화학 플랜트에서 생산기술 업무를 하다 보면 구매나 조달 부서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생산기술은 설비와 공정, 공사 일정, 생산 일정 등을 고려해야 하고, 구매는 가격과 공급업체, 계약 절차, 납기 등을 관리하기 때문에 각각의 입장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따라서 같은 회사 안에 있으면서도 서로를 비판하거나, 마치 협력 관계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생산기술과 구매 모두 회사의 생산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입니다. 어느 한쪽이 문제를 떠안는 방식보다는 서로 가지고 있는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해결책을 찾는 것이 전체적으로 더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약 15년 동안 생산기술 업무를 하면서 구매와 조달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물론 회사의 규모와 조직 구조, 구매하는 자재와 설비의 종류에 따라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아래의 내용이 모든 회사에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실제 화학 플랜트에서 납기 지연과 설비 조달 문제를 경험하면서 느꼈던 내용을 바탕으로, 생산기술과 구매가 어떤 방식으로 협력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생산기술 측에서 할 수 있는 일
이번 사례만 놓고 보면 저는 구매 측의 문제가 조금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산기술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생산기술에서도 사전에 할 수 있는 일이 상당히 많습니다.
제가 과거 생산기술 업무를 담당하면서 사용했던 방법들을 보면, 처음부터 완성된 시스템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대응 방법을 만들어 갔습니다.
구매 요청을 가능한 한 빨리 한다
생산기술이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구매 요청을 빨리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국제 정세 등의 영향으로 납기 지연이 발생하면서 사내에서도 구매 요청을 가능한 한 빨리 진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지시에는 단순히 구매 요청을 빨리 하라는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공정이나 제조 측에서 필요한 조건을 결정하지 않으면 설비나 자재를 구매할 수 없고, 결국 납기를 맞추지 못해 생산이 중단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생산기술이 상류 부서의 결정을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조건을 빨리 결정하도록 요청하거나 압박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산기술의 입장에서는 제조 부서에 강하게 이야기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장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은 아무리 요청해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때로는 “이 시점까지 조건이 결정되지 않으면 원하는 납기를 맞출 수 없습니다”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번 사례처럼 실제 필요한 리드타임이 약 2주인데 약 1개월 반 전에 발주했다면, 생산기술 측에서 구매 요청을 늦게 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납기 지연 가능성이 있는 공급업체라는 정보를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면, 생산기술 담당자가 상당히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납기에 버퍼를 설정한다
구매 요청을 빨리 하는 것과 함께 중요한 것이 납기에 여유를 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장기 납기 품목의 경우 실제 공사에 필요한 날짜보다 조금 앞선 날짜를 희망 납기로 설정할 수 있습니다.
화학 플랜트의 배치 플랜트에서는 1년 또는 1년 반 정도의 장기 납기 설비를 다루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구매 요청을 일찍 하는 동시에 실제 필요한 날짜보다 약 한 달 정도 여유를 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설비가 조금 일찍 공장에 들어와도 보관 장소만 확보할 수 있다면 공사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을 지나치게 일반화하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항상 여유 있는 납기만 제시하면 구매 부서나 공급업체가 “이 담당자의 프로젝트는 항상 여유가 있으니 조금 늦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프로젝트에 동일하게 버퍼를 설정하기보다는 프로젝트의 중요도와 공급업체의 납기 신뢰성을 고려하여 적절한 여유를 설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구매 부서에 특별히 중요한 프로젝트라는 사실을 전달한다
납기 지연이 실제로 공장 가동 중단으로 이어질 수 있고, 남은 기간도 충분하지 않다면 해당 프로젝트가 일반적인 구매 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구매 부서에 명확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제가 근무했던 환경에서는 SAP Ariba를 사용했기 때문에 구매 요청 과정에서 요청 부서와 구매 부서가 코멘트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스템에 코멘트를 남겼다고 해서 담당자가 반드시 내용을 확인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정말 중요한 건이라면 이메일이나 직접적인 대화 등을 통해 다시 한번 위험성을 전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의 경우 이런 특별 대응이 필요한 프로젝트는 1년에 몇 건 정도였고, 구매 부서에서도 협조적으로 대응해 주었습니다.
반대로 생산기술에서 요청하는 건 대부분이 긴급하고, 구매 부서가 처리하는 발주 건수 자체가 너무 많아서 모든 건을 특별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는 개별 담당자의 문제가 아니라 회사의 구매 시스템 자체를 점검해야 하는 수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구매 진행 상황을 정기적으로 확인한다
납기나 공급업체의 대응이 불안한 프로젝트라면 생산기술 측에서도 구매 진행 상황을 주기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번과 같은 상황이라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구매 담당자에게 견적이나 발주 진행 상황을 확인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견적 진행 상황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이 정도의 확인만으로도 상황을 조기에 파악할 수 있습니다.
생산기술은 구매 요청을 등록하기 전까지는 상당히 긴장하지만, 일단 구매 요청을 완료하면 이후 업무는 구매 부서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손을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구매 부서가 희망 납기에 맞춰 공급업체와 조정하는 것이 기본적인 역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견적이나 발주 진행이 늦어졌다면 구매 부서에서 생산기술에 먼저 알려주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프로젝트일수록 생산기술 측에서도 진행 상황을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금 귀찮더라도 문제가 발생한 후에 대응하는 것보다는 문제가 커지기 전에 확인하는 편이 훨씬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선행 발주를 검토한다
구매 절차 때문에 시간이 부족한 경우에는 선행 발주를 검토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에 가깝습니다.
가격 협상이나 구매 절차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주해야 하기 때문에 생산기술 측에서도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방법입니다.
따라서 생산기술의 역할은 선행 발주가 필요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프로젝트 일정을 관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산 확정이나 착수가 늦어져 결국 구매 기간이 부족해지는 상황 자체를 최대한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체 설비를 구매할 수 있는지 검토한다
특정 설비나 자재의 납기가 맞지 않는 경우에는 다른 공급업체나 대체 사양을 검토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비용과 성능을 모두 만족하는 대체품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화학 플랜트라면 특정 제조사의 볼 밸브를 사용하기로 했더라도 다른 제조사의 볼 밸브를 검토하는 것과 같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기존 제조사와 다른 제품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제조 부서의 저항이 상당히 클 수도 있습니다.
또한 현재 담당하고 있는 플랜트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플랜트에서 동일하거나 유사한 설비를 구매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구매 부서에 문의한 뒤 다른 플랜트 담당자와 협의하여 해당 설비를 사용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방법이 실제로 성공하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장비 공급망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입니다.
특히 공급업체를 한 곳에만 의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거 실적이 좋다는 이유로 특정 제조사를 선호하여 하나의 공급원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공급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응하기 어려워집니다.
화학 플랜트에서 사용하는 밸브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플랜트의 설비를 전용할 수 있는지 검토한다
설비를 새로 구매하기 어렵고 다른 플랜트에 동일한 설비가 이미 있다면, 해당 설비를 임시로 전용할 수 있는지도 검토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플랜트가 정지하고 있거나 해당 설비를 사용하지 않는 등의 특별한 조건이 필요합니다.
배치 플랜트에서는 생산계획을 조정할 수 있는 폭이 비교적 넓기 때문에, 특정 설비를 사용하지 않는 생산품목이 있다면 다른 플랜트에서 설비를 빌려오는 방식도 가능합니다.
다만 이런 방법은 시스템만으로 해결하기 어렵고, 평소부터 다른 플랜트와 커뮤니케이션하고 신뢰관계를 만들어 두어야 합니다.
생산계획을 재검토한다
대체 설비도 구할 수 없고 다른 플랜트의 설비를 사용할 수도 없다면 마지막으로 생산계획을 변경하는 방법을 검토하게 됩니다.
배치 플랜트에서는 생산품목의 순서를 바꾸거나 생산 시점을 뒤로 미루는 방식으로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습니다.
생산계획에 영향을 주는 것은 생산기술이나 제조 입장에서는 실패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산 중단이라는 더 큰 문제를 피하고 피해를 최소화했다는 관점에서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구매 측에서 할 수 있는 일
여기까지 보면 생산기술 측에서도 상당히 많은 대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번 사례에서는 제가 구매 측의 문제가 더 크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구매 절차 자체보다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입니다.
납기와 가격의 경향 정보를 공유한다
구매 부서는 공급업체의 납기와 가격에 대한 정보를 생산기술보다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최근 특정 품목의 납기가 길어지고 있다거나 가격이 상승하고 있다면, 이러한 정보를 생산기술에 정기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산기술과 구매가 공급업체를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다를 수도 있습니다.
구매 입장에서는 문제가 없는 공급업체라고 생각하지만 생산기술 입장에서는 기술적인 대응이 늦어 불안한 공급업체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공급업체에서는 구매 부서의 요청에는 빠르게 대응하면서도 기술적인 문의에는 상대적으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구매 부서가 가지고 있는 납기 및 가격 정보를 생산기술에 적극적으로 전달한다면, 생산기술도 구매 요청 시점을 앞당기는 등의 대응을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과거에 제가 경험했던 것처럼 구매 부서가 “공장의 문제는 공장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식으로 납기 지연이나 예산 초과를 모두 현장 책임으로 돌리는 조직이라면 문제가 더욱 커집니다.
견적 마감일 정보를 공유한다
구매 요청을 등록한 이후 견적이 제출될 때까지 어떤 과정이 진행되는지는 생산기술에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견적 요청 후 2주를 견적 마감일로 설정했는데 실제 공급업체가 한 달 후에 답변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여러 공급업체에 견적을 요청한 후 모든 업체의 견적이 도착할 때까지 가격 검토를 진행하지 않는 내부 규칙이 있다면, 견적 단계에서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연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견적 마감일을 생산기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면 중요한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생산기술도 사전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물론 생산기술 입장에서는 이러한 사항을 구매 부서에서 일괄적으로 관리해 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시스템에 알림 기능이 충분하지 않다면, 중요한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담당자에게 직접 확인하는 아날로그 방식이 오히려 확실할 수도 있습니다.
유사 구매 사례와 대체품 정보를 공유한다
현재 진행 중인 유사 구매 프로젝트나 과거 구매 실적이 있는 유사 설비의 정보를 생산기술에 공유하는 것도 구매 부서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입니다.
납기가 맞지 않는 긴급한 상황에서 생산기술만 해결책을 찾도록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구매 부서가 이미 알고 있는 공급업체 정보나 유사 설비의 구매 실적이 있다면 생산기술에 전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납기 한계를 어디까지 단축할 수 있는지, 일부 수량을 먼저 납품할 수 있는지, 다른 공급업체를 사용할 수 있는지 등의 정보가 있다면 생산기술이 생산계획을 조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납기 지연이 이미 발생한 상황에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실제로 납기 지연이 확인된 이후에는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습니다.
구매 부서가 공급업체에 납기를 당겨 달라고 요청할 수는 있지만, 이것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현실적인 해결책이 아닐 수 있습니다.
무리한 납기를 반복적으로 요구하면 공급업체와의 관계가 악화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수리 프로젝트라면 일정 수준의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생산을 진행할 것인지 판단해야 하고, 신규 프로젝트라면 생산계획을 변경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화학 플랜트처럼 안전이 중요한 시설에서는 “일단 리스크를 감수하고 운전한다”는 접근이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생산기술이 현장을 계속 지원해야 하기 때문에, 구매 부서에서는 보이지 않는 추가 업무가 생산기술 측에 발생하게 됩니다.
이러한 숨겨진 업무까지 고려하면 단순히 “구매 절차상 문제는 없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마무리
생산기술과 구매의 갈등은 특정 회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조업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사례 역시 하나의 X 게시물에서 출발한 이야기이지만,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보면 결국 조직 간 역할과 책임을 어떻게 나누고 정보를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라는 구매 시스템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어느 한쪽이 조직 간에 벽을 만들기 시작하면 각 부서는 자신의 업무만 최적화하게 됩니다.
그러면 단기적으로는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다른 부서에 새로운 업무와 리스크가 넘어가고, 결국 회사 전체의 최적화와는 거리가 멀어질 수 있습니다.
생산기술이 구매를 관리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구매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같은 회사 안에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공유하고, 문제가 커지기 전에 함께 해결책을 찾는 것입니다.
특히 화학 플랜트에서는 설비 하나의 납기 지연이 생산 중단이나 안전 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조직 간의 작은 커뮤니케이션 차이가 실제 현장에서는 상당히 큰 차이를 만들 수 있습니다.
결국 생산기술과 구매는 서로 싸워야 하는 조직이 아니라, 회사 전체의 생산 안정성을 함께 만들어야 하는 조직입니다.
저는 이것이 단순한 “생산기술 vs 구매”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 전체가 부분 최적화가 아니라 전체 최적화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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